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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적 회화 : 무엇도 되지 않으려는 이미지

 

   우리는 우리 앞의 어떤 것이 ‘무엇’이 되길 바라고 요구한다. 재현의 세계에서 감각은 지각에, 지각은 형상에 귀속되었고, 오랜 동안 이미지는 의미 있는 상징이었다. 현대 회화는 이로부터 점차 벗어나 순수한 감각적, 회화적 요소로서 기능하며 의미있는 형식이 되었다. 또 어떤 때는 감정적 표현의 수단이거나 감정 그 자체를 촉발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행위와 제스쳐의 지표가 되기도 했다. 이미지는 기호였다가 숭고한 것이 되며, 어떤 식으로건 무엇이 되고자 했었다. 이미지는 무나 잠재적인 것일지라도 바로 그런 척 했어야 했다. 이것들이 이미지가 자신을 주장하며 살아온 역사이며, 회화도 그런 이미지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무엇으로 명확히 규정되고 정의된다는 것은 이미지의 세계에서, 물론 회화의 세계에서도 이미지가 힘을 얻고 살아가는 원천이었다. 종교적이건, 정치적이건, 이데올로기적, 나아가 문화적이건 말이다. 궁극적으로 오늘날 이미지는 하나의 상품과 스펙터클이 되려고 한다.    

   회화와 이미지의 역사에서 어떻게든 지켜진 하나의 대원칙과 규범은 존재해왔다. 이 원칙에 충실히 따를 때 이미지는 비로소 회화가 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재현 회화라면 선과 색은 외적 대상의 윤곽이거나 대상에 종속된 감각적 속성이어야 한다. 반대로 그것은 순전한 물감으로서 물질이거나 순수한 감각이어선 안 되었다. 물론 추상회화는 하나의 선과 색이 순수한 조형적 요소라는 것을 원리화했고, 나아가 하나의 행위이거나, 감정이거나, 물질임을 용인해 왔다. 그럼에도 회화를 있게 하는 그 기본 요소들이 어떤 하나의 성격과 기능을 가져야 한다는 원리는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칸딘스키에게 하나의 선은 조형적 요소임과 동시에 억눌려 잠재된 제스쳐였다. 제스쳐적 성격은 요소들의 조형적 자질과 음악적 구성 아래 숨겨졌다. 앵포르맬 회화에서 색채는 하나의 물질로서 물감이었고, 추상표현주의자들에게 하나의 행위로서 색과 선은 예술가의 내적 상태와 등가적인 것이었고, 로스코에게 하나의 색은 본질적으로 생생히 살아 있는 감각이었다. 하나의 회화적 요소의 성격과 기능을 분명히 정의하라는 것, 회화 안에서 그것을 일관되게 유지하라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이미지의 전통적 규범들에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한 이후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화의 미덕이다. 이는 존재론적 미덕이기도 하다. 한 회화의 선명성은 이 미덕을 지킨다면 어떻게든 얻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김수민의 것에서 이 미덕은 규범이지 회화의 사실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기본적인 회화적 요소들과 범주들은 전이적(transitive)이다. 하나의 드로잉 선은 그저 하나의 선이기도 하면서, 칼리그라피적 요소가 되기도 하고, 색이 되기도 하고, 제스쳐도 된다. 형태나 패턴의 일부,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지각적 형상의 윤곽이 되기도 한다. 그에게 색채는 지각적 대상의 속성이기도 하고, 평면에 발리는 물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감정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무엇이 되려다 다른 무엇이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무엇으로 보고 규정하려는 순간 다른 무엇이 된다. 

   이런 다층성과 전이적 성격을 잘 보여줬던 이로 드 쿠닝의 <Woman> 연작을 들 수 있다. 회화적 요소들의 전이적 성격을 의식하고 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모더니스트였다. 그는 그것들을 어떻게든 종합하고 통일하려고 했다. 물론 그는 초기에 그것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후반기에서야 전이성을 공간의 문제를 푸는 열쇠로 이용했다. 반면, 김수민은 이런 전이성이 동시성과 통일성의 전통적 원칙에서만 대립과 모순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전이성 그 자체를 회화의 가능조건으로 받아들이고, 대립과 모순을 전이적 과정으로 해소한다. 우리는 김수민의 것에서 하나의 선이었다가 제스쳐가 되고, 반복적 패턴이었다가, 어느 순간 칼리그라피가 되는 선의 전이성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통일성과 동시성의 시각적 원리, 그리고 회화적 요소들이 단 하나의 성질과 자질로 기능해야 한다는 비모순의 논리 아래 그의 그림을 포착하려는 순간 불쑥 나타나서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대할 때 우리는 전이성의 과정을 회화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전통적인 두 원리는 회화의 사실이 아니라 규범이다. 그 규범은 표상주의, 본질주의, 관념론과 결과 중심의 지각과 사고에서 작동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회화가 되어 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전이성의 사실과 그것의 자연스러움이다. 부리요는 태도가 작품이 된다고 했던가. 김수민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회화적 전이성은  김수민이 이미지와 회화를 대하는 근본 태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수민의 회화는 이런 점에서 이미지와 회화 자체에 대한 메타비평이다. 이는 그가 단색의 평면적 배경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더 분명하다. 그도 물리적인 평면적 지지대로부터 시작해 보고 싶은 것이다. 전이성은 뷔렝(Daniel Buren)이 미니멀리즘 양식의 작품들을 전시장의 창문 너머나 갤러리 바닥으로 빼내면서(회화적 프레임을 넘어 현실로 전이) 이미 예고된 것이다. 발데사리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겐 모더니즘의 양식적, 시각적, 기능적 통일성에 대한 의식적 거부로 사용되었으며, 톰블리에게선 쓰기와 그리기 간의 전이로 특징되는 그래피즘으로 나타났다. 이후 어떠한 회화적 양식과 장르, 규범들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키펜 베르거(Martin Kippenberger), 사물과 회화간의 형식적 포맷 전환을 보여준 피터 도이그(Peter Doig), 장르적 번역 과정을 보여준 토마스 에거러(Thomas Eggerer)의 것으로 전이적 회화의 명맥이 이어져왔다. 반면, 김수민의 것은 이들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하나의 회화작품 바깥으로의 전이성이 아니라, 회화 내부에서의 전이, 즉 회화를 이루는 요소들 간의 발생적 전이성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의 작업엔 몇 줄의 문자적 끄적임이 감각적인 붓질로 전이하고, 하나의 붓질이 색채가 되고, 나무의 기둥이 되며, 반대로 나무의 기둥이 하나의 붓질로 전이한다. 김수민의 회화엔 이런 전이적 과정 그 자체에 대한 경탄이 있다. 그의 회화는 전이성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다. 회화적 요소들이 회화 내에서 완전히 정의되지 않도록 하고, 이미지와 전체 회화가 완결된 무엇이 되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그것은 회화적, 문화적 규범이 작동하기 전의 상태이며, 예술가가 나서서 그것들을 기술적으로 통제하기 전의 어떤 것이다. 김수민에겐 이미지가 그 스스로 어떻게 되어 가는지가 바로 문제다. 그는 이 지극한 회화적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순수하지 않은 눈은 이 회화적 사실과 발생적 과정이 아니라 또 다시 거기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작가의 정서적 상태가 어떤지, 감각들과 공간의 동시적 배치가 무엇을 의미하고 상징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과정이 아니라 존재 혹은 고정된 대상, 표상적 사고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무엇인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의 사이에 머무는 것, 여기에 김수민 회화의 묘미가 있다. 무엇으로 완전히 정착되지 않으면서 다만 어떤 잠재적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 것, 감각을 미, 형식, 형상에 귀속시키지 않으면서도 감각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 그것은 극도로 세련되고 예민한 감각을 요구한다. 

   그는 이전의 개념적인 작업들에서 유독 과정적, 시간적 개념들(moment, sequence, process, incomplete)을 의식해왔고, 금번의 전시에서도 그의 회화는 과정으로서 존재하는 미완의 무엇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미완은 단순히 한 회화가 아직 미완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미완은 미완이 다다를 종착지를 염두에 두는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다. 기원과 목적론의 시간은 시작과 끝에 종속된 시간이다. 미리 예정된 청사진과 그에 따라 완성된 무엇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다시 시간 그 자체를 잃고 잊어버린다. 반면, 그에게 미완은 과정 그 자체에 주목하라는 의미에서 의도된 미완이다. 그가 의도한 것이 있다면 이 의도된 미완이다. 

   회화의 가장 강력한 규범을 깨트리고 마켓의 요구를 비트는 건 화가로서는 매우 커다란 모험이다. 조슬릿(David Joselit)이 힘주어 말한 것처럼, 그의 작업은 마켓이나 전통적 규범에 따라 매끄럽게 완성된 작업들에겐 바이러스 같은 것이 된다. 그의 회화는 이미지가 살아온 규범과 전범의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며, 이미지가 힘을 얻었던 그 원천들을 스스로 내려놓으며 이미지의 역린을 건드린다. 회화와 이미지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이미지가 무엇이라도 되길 원하지만, 반대로 오늘날 이미지는 너무나도 ‘무엇’이다. 아니 예전부터 그랬다. 이미지는 진리를 반영하거나, 성스러움의 현현이거나, 사실들을 표상하거나, 본질의 상징이나 시적 은유가 됐었다. 교훈적 알레고리가 되었고, 이데올로기의 전사가 되었고, 표현이나 형식의 일부도, 기호도, 상품의 스펙터클도 되었다. 김수민의 무엇도 되지 않으려는 이미지는 기질적으로건 의도적으로건 이것들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묘한 해방감과 자유를 준다. 그의 이미지들은 완전함의 이미지인 원이 환공포를 일으키는 것과 정반대의 지점, 바로 그곳에 있다. 아마도 그 이미지는 김수민 그 자신의 이미지일 것이다. 

 

 

                                                                                                                                                                                                                    조경진(미술비평,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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